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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나의 앤트맨 부친

부친은 자그마한 물건들을 좋아했다. 부친은 30년 경력의 건축 골조 노동자였다. 젊을 때 도박에 빠졌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가정을 위해 손을 씻었다. 그리고 이제 부친이 은퇴했다. 부친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다.

 부친은 침묵했다.

 2005년, 타이완이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연합에 가입해 가두 행진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성소수자 행사가 흔치 않았다. 매체에서는 모든 관련 소식을 체에 거르기라도 한듯 내보내지 않았고, 해당 뉴스는 물에 녹는 알갱이처럼 무색무취하게 모든 가정집 티비에서 사라졌다. 그날 저녁 나는 대학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부엌으로 가 저녁 준비하는 걸 도왔다. 밥솥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보글보글 끓는 국의 수증기가 공기를 데웠다. 모친은 한쪽에서 야채를 씻다 물었다. “여자친구는 있니?”

 엄마는 알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자식들에게는 추리에 일가견이 있는 모친이 있지 않나. 모든 일기가, 오가는 편지가 증거가 된다. 심지어 말 한 마디도. “여자친구 있니?”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 한 마디에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가 다른 어떤 말로 대답을 회피해도, 그 문제는 수년간 변함없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있었다.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고 주방에 들어오는 효자 아들과 남들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는 성소수자 아들 이 둘 사이에서 나는 줄다리기를 했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다 알았다. 그저 엄마만이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제발, 여자친구를 사귀겠다고 나한테 말해다오.’ 이럴 거면 차라리 밑장 카드를 까버릴까. 한번에 엄마가 단념하게.

 그날 나는 후자를 택했다.

 물 소리가 나고 있었고, 엄마는 손으로 채소 잎을 끊고 있었다. 한번 또 한번 맑은 소리가 났다. ‘만일’의 사태까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던 내게, 그녀가 먼저 입을 뗐다. “너가 평생 말 안할 줄 알았어.”

이 말로 인해, 나는 며칠 뒤 당시의 남친을 집에 초대했고 데려와 같이 밥을 먹었다. 모친과 그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한 이야기라고는 온통 주식 관련이었지만, 장래를 생각할 때 모친은 그를 맘에 들어했다.

 남친을 보내고 나서, 상황을 모르는 부친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잠들기 전 나는 그가 방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아, 놓쳤구나.” 나와 부친 사이의 거리는 줄곧 이랬다.

 나와 부친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그는 늘 부재중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갔을 때, 태풍 나리가 타이완에 상륙했다. 모든 버스가 흙탕물에 휩쓸려 폐차 신세가 되었다. 학교 수업이 재개되자, 부친은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주었다. 이때 부친이 나를 태워다 준 것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삼년 내내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주는 아이’가 되었다.

 이팔청춘이었던 나는 외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가끔 몸에서 향수 냄새나 왁스 과일향이 나기도 했다. 나는 부친의 비염을 물려받았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냄새를 잘 못 맡았고, 차 안 가득 채우던 이 냄새는 결국 이 부자만 모르는 비밀이 되었다. 차 안에서 내내 대화가 없다가 내가 차에서 내릴 때가 되서야, 부친이 입을 열었다. “좋은 냄새가 너무 나네.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눈총 받지 않게 조심해라.”

나는 알겠다는 한 마디를 하고, 차문을 닫고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초등학교 때 나는 아빠가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애들이 부러웠다. 차가 학교 정문 앞에 오면, 친구는 차문을 열고,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있는 아빠에게 뭐라 말을 하고, 발걸음도 즐겁게 학교에 들어간다. 나는 자주 상상했다. 그 밀폐된 공간에서, 아이는 아빠와 대체 무슨 말을 남들 모르게 할까? 뽀뽀해달라, 안아달라, 사랑한다 말해달라 하지 않을까? 차문이 닫힌 후, 차 핸들을 잡고 있는 아빠는 아마도 흐뭇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겠지.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눈총 받지 않게 조심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무심코 백미러를 통해 아빠와 시선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피한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몰래 또 다시 시선을 백미러로 돌리니 부친의 눈썹 끝이 점점 길어지고 하얘진 것을 본다. 꿈 속인가 싶을 때쯤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문 앞에서 애들은 끼리끼리 웃고 재잘대며 들어가고, 나도 그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이제는 혼자 학교에 가야 하는 나이였다.

내 등 뒤로 부친은 핸들을 돌려 차를 뺐고 고속도로로 올라, 도시 변두리를 향해 운전했다. 이 도시는 부친의 발자취 덕에 확장된 거나 다름 없었다.

 1980년대 부동산 시장이 들끓었고, 집값이 폭등했다. 도시 안에 살던 사람들이 더 나은 주거지를 찾고자 도시 변두리로 옮겨갔다. 그 당시 부친은 가정을 이뤄 애를 낳고도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다. 같이 살던 노모는 친한 친구들을 삼합원에 불러 노름, 마장, 카드 놀이하기를 즐겨했다. 왠만한 노름 장비는 다 갖춘 터라, 잠깐 소시지 팔러 온 트럭의 장삿꾼이나, 누구라도 소식만 닿으면 벌떼처럼 몰려와 노름판을 벌였다. 모친은 화를 참지 못하고 집안의 모든 서랍장과 탁자, 의자를 다 뒤집어엎은 뒤, 아직 핏덩이였던 나를 옷 더미 속에 숨겨놓은 채 집을 나가버렸다.

 삼합원에서 날이 지도록 노름을 하다 하다 화장실에 가려 몸을 일으킨 부친. 방에 들어와 물건이 온통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고,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아내는 그림자도 안 보이고 대관절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모든 이들이 도박 테이블에 앉아 운명이 교차하는 술수를 부리고 있는 그 틈에 나는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 나는 곳을 찾아 수박을 안아들 듯 나를 안아 올린 부친은 그 당시 폭탄머리를 하고 있었다. 손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새가 꼭 디스코 댄스홀에서 양아치가 입구에서 아기를 주워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우쭈쭈, 얼럴러러러… 우는 아이를 달래는 모습이 길가는 어린이도 알 수 있었다. 손과 발을 쓰며 각종 짐승을 놀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그가 얼마나 당황한 상태인지. 부친은 장인 댁에 가 신신당부 끝에 아내를 데려온다. 대신 도박, 담배, 술을 끊기로 약속한다. 약간의 빚을 얻어  별도로 신방을 차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돌아올 대출금을 상환하기엔 부부 두 사람의 월급은 역부족이었기에, 그날로 부친은 건설붐을 타고 건설 골조 노동자가 되었다.

 그렇게 안정이 되자, 부친은 비로소 부친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전에는 일개 공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망나니 도련님에 불과했다. 집은 철근을 세워 시멘트를 붓기 전, 먼저 설계도에 따라 골조를 고정해놓아야 섞어놓은 흙의 모양이 잡힌다. 도련님은 아빠가 되더니 폭탄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리고 매일매일 몸에 흙먼지를 잔뜩 묻힌 채 귀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부친이 먼지 바람으로 집에 돌아와, 밥은 먹었냐, 숙제는 다 했냐, 시험은 언제냐고 묻는 소리를 맨날 들었다. 그러는 아빠한테 엄마는 핀잔을 주었다. “가서 씻기나 해요! 아이들은 지들이 알아서 다 했다고.”

 부친은 머쓱해하며 욕실로 들어가, 톱밥과 먼지로 가득한 옷을 욕조 안에 넣고 발로 밟아 빨았다. 그리고 다시 세탁기로 빨았는데, 내 교복을 빨아줄 때는 먼저 세탁기 속에 남아 있는 먼지들을 씻어내야 했다. 가끔 밤에 탁탁탁 오가는 그의 발소리가 났는데 그는 냉장고를 열어 과일을 찾거나 거실에서 티비를 보거나 내 방문 바깥에서 책 보고 있는 나를 보곤 했다. 그럼 나는 고개를 돌려 힐끗 보고 그도 나를 힐끗 본다. 늘 그렇듯 별다른 중요한 일이 없으면 그렇게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간다.

 우리 사이에는 사람 어색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끊을 수 없는 탯줄 같은 게 있었다.

 대학 여름방학 전, 나는 기숙사에서 나와 부모 집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부친에게 기숙사 짐을 차로 실어다달라 부탁했다. 옷, 신발, 교재, 소소한 잡동사니들. 부친이 한 꾸러미를 손에 드니, 우당탕탕 병들이 부딪힌다. 그 속에서 각종 샴푸, 향수 냄새가 흘러나왔고, 아빠는 가방 속 물건들을 살짝 보고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캠퍼스를 운전해 나오다 부친이 갑자기 말했다. “니네 학교 여기 몇 개 동도 내가 골조 만든 거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건물이 아빠가 땀흘려 만든 것이라니. 캠퍼스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그는 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동도 저 동도.”  이렇게 부친이 손짓을 하자, 풍경 속에서 도시에 선이 하나 그어졌다. 그 선을 따라 건물 한 동씩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윤곽 안 쪽에 컬러가 입혀진다. 도시는 그의 손에서 끝 모를 동심원으로 확장되며 거대한 성이 된다.

 그가 이십몇 층짜리 큰 건물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 동 지을 때 너가 막 초등학교 졸업했지.”

초등학교 졸업식 그날, 모든 졸업생은 가슴에 꽃을 달고 졸업식에 참가했다. 잘 울던 나는 생각했다. ‘송별의 노래를 반 정도 부르면 눈물이 나겠지 또.’ 하지만 나는 끝까지 울지 않았고, 강당 밖에 나와 저마다 부모 손을 잡고 떠나는 친구들을 보자, 그제야 눈물이 떨어졌다. 내 졸업식에 오겠다고 약속했던 엄마 아빠는 대체 어디 있는가. 다른 학부모들처럼 강당 2층에서 열띤 관심과 응원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었어야 하지 않나. 만약 그러한 눈빛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시간에는 영원히 매몰되고 말 단층이 하나 생기게 될 것이다.

 그날 나는 열쇠로 집 문을 열고 들어와 교복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던져넣고, 방문을 걸어잠근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부친은 현장에서 돌아와, ‘졸업생’ 세 글자가 적힌 부토니아를 분명히 봤을 것이다. 시간은 돌아온다. 보이지 않는 형식으로 다시 한번 부모 자녀 사이의 관계를 바꿔놓는다. 부친이 일할 때, 나는 맘 놓고 공부했고, 그가 퇴직하니 나는 일로 바빠 그가 보호하는 우주 속에서 자주 부재중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아 단장을 시작한다. 토너로 피부를 두드리고, 선크림을 바른다. 안색이 뜬 날은 톤업 효과가 있는 비비크림을 바르거나 펜으로 눈썹을 그린다. 화장지로 깔끔히 닦아준 후, 렌즈를 끼고, 왁스로 머리를 정리한 후, 향수를 고르고, 옷장 앞에서 옷을 고른 후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몇 년 전, 모친은 내가 외출 준비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싫어했다. 하지만 ‘나는 니가 평생 말 안할 줄 알았다.’ 이 한 마디가 수술 칼이라도 된 듯 나와 그녀 사이에 있던 어색한 긴장의 종양을 도려냈다. 그 뒤로 우리는 자매처럼 피부 관리 비결을 교환하고 엄마는 당당하게 내 방에 와 향수를 얻어 쓰고, 소녀처럼 연예인 누구누구가 어떻더라 저떻더라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혹시 내 타입은 아닌지 묻기도 했다.

 탁탁탁 피부를 두드려 토너를 흡수시키고 있을 때 부친도 이미 기상해 있었다. 그는 테라스에 가득한 바닐라에 물을 주고, 향을 피우고 공양을 하고, 깨죽을 끓여 아침식사로 준비했다. 조용히 내 방문 앞에 와 내가 거울 앞에서 꾸미고 있는 걸, 그로써는 평생 왜 저러는지 모를 짓을 하는 걸 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고 나는 고개를 돌려 본다. “냉장고에 과일 있어. 회사 가지고 가서 먹어.”

 어릴 때 새벽 6시면, 부친은 알람 소리에 일어나, 헤진 옷을 걸치고, 베란다에 가득 걸린 구멍이 난 긴 발목 양말 중 하나를 내 방문 앞 계단에 앉아 신었다. 몸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출근을 거부하는 몸에 억지로 양말을 끼우는 듯했다. 작업 중 긴못이 신발을 뚫고 들어오더라도 최소한 양말이 있으면-당연히 양말이 못을 막지는 못 한다- 상처에서 흘러나올 피는 흡수될 테니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부친의 등을 본다. 그때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그가 나의 등을 보게 되었다.

 집을 나서기 전, 나는 베란다에 나가 내가 좋아서 심었던 바닐라 화분을 본다. 퇴직하고 부친이 분을 가르고, 옮겨 심어 왕성히 자랐다. 페퍼민트 화분들은 한 줄을 이뤄 페퍼민트 숲을 이뤘다. 바질과 로즈마리는 풀이었던 것이 거의 나무가 되었고, 다육이들은 우뚝 솟아 풍성했다. 매번 바닐라풀 한 줄기를 가지고 오면 베란다에 두었다. 그리고 쪽지에 습성과 용도를 적어 붙여둔다. 백리향, 건조한 걸 좋아함, 해산물에 어울림. 캐모마일, 일조량이 충부해야 하고, 설탕 대신 쓸 수 있음, 아빠가 쓰기 좋음. 운향, 건조해도 잘 견딤, 방충 효과.

 쪽지를 남긴 다음날이면, 식물들이 꽃시장에서 그대로 가져온 값싼 플라스틱 화분에서 큰 꽃화분으로 옮겨진 것을 보게 되었다. 배양토, 자갈, 사토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는 부친만이 안다. 포기를 나누고 꺽꽂이를 하는 것도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봤거나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것이다.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부친이 그 쪽지들을 분명 꼼꼼히 읽어봤다는 것. 쪽지는 마치 러브레터처럼 버려지지 않고 그의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부친은 아직도 베란다에서 합성수지 끈으로 받침을 만든다. 핸드메이드로 뭘 짜는 게 유행하던 때였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HBO를 보면서 거대한 그물을 짜 그 바닐라풀들을 담았다.

 부친이 이러한 세심한 수공 일을 내 생각보다 훨씬 잘했다. 운향은 심은 지 1년이 되자, 집에서 모기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됐다. 퇴근해 엄마 말을 듣자니, 아빠가 언젠가 밤에 그랬단다. 전기모기채도 쓸 일이 없어졌다고.

 “너랑 니 아빠 사이가 좋은 편이긴 하지, 서로 말은 많이 없어도.” 엄마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어떨 때 보면 나는 딸 같다고 느껴진다. 부친은 내 방에 들어오면 내 베개와 이불을 다시 정리하고, 옷들을 옷걸이에 걸고, 휴지통을 비웠다. 원래는 1회용 콘택트 렌즈 상자, 화장품 포장재, 눈썹 펜으로 그어 시커매진 휴지들이 있었을 터다. 그는 이런 쓰레기를 보고도, 다시는 “좋은 냄새가 너무 나네. 눈총 받지 않게 조심해”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로써는 그닥 이해 못할 이 방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깨끗하고 질서 정연한 우주로 원상복귀시킬 뿐이었다.

 부친은 침묵했다.

 그는 도심에서 변두리에 떠났다가, 다시 도시로, 집으로 돌아온다. 내 삶에 나타났다가 멀어지고 지금처럼 또 돌아온 것과 같이. 비록 이제는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아야 할 지도 까먹어버렸지만, 마치 개미처럼 서로가 남겨둔 힌트를 통해 사정을 이해하고, 정보를 주고 받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얼마 전 친척네 갔다가,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는 결국 언제 결혼하고 아이 낳을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뭐라 대응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그때, 부친은 지나가듯 가볍게 내가 어찌 중재해야 할지 모를 이 사회적 시선을 대신 막아주었다. “쟤요, 지 멋대로 편하게 지내는 것만 좋아하니까, 쟤랑 같이 살면 그 사람만 손해예요.”

 부친은 망나니 도련님 출신 답게 주변의 각종 압박을 아주 유연하게 피하고 도망갈 줄 알았다. 영화 《앤트맨》에서 남자 주인공의 딸이 붙잡혀 협박을 당할 때, 그는 앤트맨 복장을 하고 쌀알 크기로 작아져 딸의 침실에서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두 사람은 달리는 열차 위에 서서, 괴력으로 열차를 손에 들고 때려부순다. 미국 서부 카우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향해 레이저를 쏜다. 카메라 렌즈를 멀리 줌아웃하면, 문가에서 의혹 가득한 표정을 한 딸이 장난감 기차 레일 위 반짝거리는 LED 빛을 보고 있다. 그때 창가에 물건 하나가 날아오는데-부친은 별 일 없는 거 맞겠지?- 알고보니, 토마스기차의 열차 칸 한량이었다.

 골조, 화초, 쓰레기, 옷, 화장품, 도시에서 부친이 손수 창조한 내 방 속 우주까지 이 모두가 부친이 세계와 싸워 얻어낸 것이다.

 문득 몇 년 전의 그 말 “아, 놓쳤구나”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가 간다. 부친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와 허물 없이 지내왔다. 스스로는 거대한 짐을 진 채, 그가 구축해놓은 영역 밖을 내가 맘껏 탐색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에는 나는 촉수를 움직여 보이지 않는 원래의 궤도로 돌아왔다. 오직 그와 나만이 맡을 수 있는 그 궤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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