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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루크와 자유의지 당신의 행위는 진정 당신이 결정한 것인가?
고금을 막론하고, 이 세상의 각종 변화가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는다고 믿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늘 있어왔다. 이러한 사람들은 손에서 놓은 계란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부터 식물이 생장하는 비교적 복잡한 일까지 물질은 모두 자연법칙을 따라 운행하고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지구 인력 범위 내에 있고 아래쪽이 물건으로 막혀 있지 않다면, 손을 펴면 손 안의 계란은 곧장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환경과 조건이 양호하고, 유전적 결함이 없기만 하다면 식물은 점진적으로 자랄 것이다. 만약 세상 만물의 변화가 모두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는다고 하면, 과연 인류의 행위는 통제를 받을까 어떨까?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우리의 의식적인 행위는 모두 각종 상황과 필요를 따져본 후에 결정한 것으로, 마치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각종 상황과 필요를 따지고 결정을 내리는’ 데 대뇌를 쓰는 것은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는 일군의 신경세포 아니던가? 만약 우리의 대뇌도 자연법칙의 통제를 받는 것들 중에 속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사고 결과는 자연법칙을 따라 변화한 결과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분을 고민한 끝에 갈비덮밥 말고 우육면을 먹기로 선택했다.’ 사실 고민을 시작할 때 대뇌 속 욕망과 신념의 조합을 미리 설정해놓기만 하면, 더 자세히 말해서 고민을 시작할 때 내 대뇌 속 모든 세포의 생물화학 상태를 사전에 맞춰놓으면 몇 번을 다시 고민하더라도, 나는 모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결정론은 자유의지를 위협하는가?
‘만물은 과거의 상태와 자연법칙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러한 생각을 철학에서는 ‘결정론(determinism)’이라고 부른다. 물론 모두가 결정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호기심 왕성한 철학자들은 종종 참지 못하고, 이러한 가설을 내곤 한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인류에게는 여전히 소위 자유의지(free will)라는 게 있을까?’ 우리의 모든 행위를 자유롭게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러한 행위들에 책임을 져야 할까? 만약 결정론 하에서도 인간에게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곧 우리 행위가 대뇌 상태와 자연법칙의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대뇌상태와 자연법칙을 동일하게 조정하면 우리는 반드시 같은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행위는 우리 자유에 따라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법은 이상한 구석이 있으므로, 이것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구원에 나선 루크
만약 당신이 이 문제에 흥미를 느낀다면 아마도 존 루크가 16세기에 제기한 사례 하나가 당신에게 시사점을 줄 것이다. 깊은 밤, 대학원생 아푸는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기만 하면, 냉장고에 소시지가 있고 전자렌지에 몇 분 돌리기만 하면 굉장히 먹음직스러울 거라는 걸 그도 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매우 졸리다. 침대에서 내려와 소시지를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 몇 분을 더 생각한 후에, 아푸는 야식을 먹지 않고 일단 자기로 결정한다. 아푸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은, 룸메이트가 장난으로 밖에서 방문을 잠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만약 애초에 그가 일어나 소시지를 먹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실은 하려던 일을 할 수 없었다. 이 예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아푸의 룸메이트가 장난치길 좋아한다는 점뿐 아니라, 아푸가 처한 상황이 특수하다는 데 있다.
그가 ‘소시지를 먹지 않고 바로 가서 잔다’의 결과는 결정되어진 것이다. 그가 소시지를 먹겠다고 결정했더라도, 잠긴 문에 의해 그 일은 이룰 수가 없이 저지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푸가 ‘자유롭게 소시지를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 자기’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봤을 때, 최후의 행동은 결정되어진 것이고, 이루어져만 한다. 반드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나?
아닌가?